20161220 뮤지컬 '서울의 달'

문화생활|2017.09.05 03:21

사실 나는 이 뮤지컬의 원작인 동명의 드라마를 본 적이 없다. 사전에 알고 있던 지식으로는 한석규가 나왔었다는 것 정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스터를 보는 순간 이 뮤지컬은 꼭 보고 싶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아마도 '서울의 달'이라는 제목과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는 카피라이트 때문이었을 것이다. 포스터 한 장 봤을 뿐인데 이미 내 머릿속에는 과거 서울을 배경으로 한 청년의 불꽃 같은 인생이 한바탕 펼쳐진 뒤였다.

그리하여 언제 보러갈지 고민하던 차에 감사하게도 초대권을 받는 기회가 주어졌다. 내가 보러 간 날은 이필모 배우와 박성훈 배우의 캐스팅이었다. 이필모 배우는 TV 드라마에서 번듯한 이미지였던 것 같은데 과연 제비 역할을 소화해 낼 수 있을지, 걱정 반 기대 반의 심정으로 공연 시작을 기다렸다.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은 무대가 좌석보다 높은 편이었다. 내 자리는 2층 중간블럭이었는데 시야가 생각보다 쾌적해서 놀랐다. 1층 앞줄에서 봤다면 배우들의 표정이 생생히 보였겠지만 내 자리에서도 공연에 충분히 몰입할 수 있었다. 서울의 달이 무대를 전체적으로 쓰는 편이라 무대 연출이나 세트 위주로 감상하고 싶다면 2층 앞줄이 괜찮아 보였다. 공연 시간은 1부가 55분, 2부가 55분으로 인터미션이 20분이나 되었다. 근래 본 공연 중에 인터미션이 제일 길었다.

줄거리는 드라마가 원작인 만큼 원작의 노선을 그대로 따라간다. 서울 한복판의 달동네 서민들이 꿈꾸는 신분 상승, 사랑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었다. 그러나 마냥 80년대 후반, 90년대 초반을 떠올리게 하는 복고적인 뮤지컬은 아니다. 이를테면 그 시절에는 없었던 5만원권을 스크린에 영사한다든지, 요즘 쓰이는 단어(아이스 아메리카노, 타워팰리스 등등)나 말투가 툭 던져질 때 현대풍이 가미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드라마를 본 사람이라면 더 쉽게 이해했겠지만 뮤지컬로 처음 보는 나도 줄거리를 파악하는 데 어려움이 느껴지는 작품은 아니었다. 서울에서 제비족으로 살아가고 있는 김홍식은 마이깡을 갚기 위해 고향 친구 이춘섭에게 취업 사기를 친다. 서울에 있는 대기업에 취직시켜줄 테니 5천만원을 들고 오라는 것이다. 물론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 5천만원을 건넨 춘섭은 홍식을 다시 볼 수 없었다.

결국 공사판에서 일용직 노동자로 먹고 사는 처지가 되었지만, 춘섭은 친구를 원망하기는 해도 철천지 원수처럼 여기지는 않는다. 개인적으로 그가 공사장에서 부른 넘버가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Boys, be ambitious!'를 입버릇처럼 외는 홍식에게 '뭘 자꾸 이루려고 하지마라, 태어난 순간 다 이룬 거다'라고 타이르는 춘섭이다. 그런 그의 현실순응적이고 낙관적인 성향이 잘 드러나는 노래였다. 중간중간에 들어가는 화음 덕분에 더욱 상쾌한 느낌이 들었다.

그 이후 춘섭은 공사판 인부가 술 한 잔 하자고 이끈 달동네에서 홍식과 재회한다. 고향 사람들 모두가 '개쓰레기'라고 욕해도 친구라고 생각했기에 배신감이 컸고, 그러나 친구라고 생각하기에 주먹다짐 이후 자연히 화해하게 된다. 홍식은 이 달동네, '달빛마을'에서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노인의 아들 행세를 하며 얹혀 살고 있었다. 그런 그를 흘겨보기는 하지만, 달빛마을 사람들은 가난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기에 서로를 아끼고 보듬는다. 비록 가진 것은 적어도 하루하루 자신들의 삶 속에서 소소한 행복을 느끼며 살아간다.

그 동네에 영숙이 있다. 부잣집 영애인 척하며 자신이 일하는 백화점의 부사장 아들과 교제하는 영숙도 홍식처럼 신분 상승을 꿈꾸는 젊은이이다. 그렇다고 그녀가 달빛마을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부잣집 앞에서 발걸음을 돌려 집으로 돌아오는 영숙이 여기가 내 자리, 하고 부르는 넘버에서 달빛마을을 사랑하는 따뜻한 마음이 전해졌다. 성공하고 싶다는 욕망은 홍식의 그것과 닮아 있으며 현실을 사랑하는 마음은 춘섭의 그것과 닮아 있다. 그래서 두 남자가 모두 영숙을 사랑한 걸까.

한편 제비족 스승으로부터 비법을 전수받은 홍식은 결국 상류층 여인, 부서현의 마음을 사기에 성공한다. 그는 달빛마을에 안녕을 고하고 마침내 그토록 그리던 상류사회에 입성한 듯 보였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스승이 우려한 것처럼 제비의 본분을 넘어서 여자의 등골을 빼먹은 홍식, 그 욕망이 불러온 파국의 끝이 보이기 시작한다

공연이 끝난 후 약간은 멍해진 내 머릿속에 홍식의 대사 하나가 떠올랐다. '버릴 거잖아, 쓰다가 버릴 거잖아!' 서현에게 공사치는 도중에 한 말이었지만 실은 밑바닥 경험에서 우러난 본심이었을지도 모른다. 자기 마음에 안 들면 남의 인생을 손쉽게 망쳐버리는, 소위 상류층의 비정함은 영숙이 해고 당하는 과정에서 이미 본 바있다. 서현의 오빠 역시 홍식을 달동네 철거에 투입시켜 자신의 손을 더럽히지 않고 일을 처리한 후 끝내 스스로 자멸하게 만들었다. 서현은 홍식에게 아니라고 완곡하게 부인했지만 결국 그의 예감이 맞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무리 배신당한 사랑의 끝맛이 쓰다한들 그런 식으로 보복하다니, 결말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

이게 가상의 공간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였다면 극장을 나오며 그저 여운에 젖었을 것이다. 그러나 서울의 달은 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을 배경으로 서민들의 삶과 욕망을 다룬 국민 드라마이다. 그 시대에 있었을 법한 사실적인 스토리이기 때문에 더 이입이 되었던 것 같다. 눈부신 경제 발전과 함께 양극화가 심화된 현대에는 새로울 것도 없이 더욱 공감대를 이끌어낼 수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각자도생, 승자독식, 유체이탈, 책임회피'라는 노랫말이 가리키는 것은 현대 서울 그 자체 아닌가.

김홍식이라는 캐릭터가 비록 제비족에 친구 돈을 사기치는 등 다른 사람을 등쳐먹는 속성이 있기는 하지만 달빛마을에 그를 진심으로 미워하는 사람은 없었다. 취객의 양복 재킷을 빌려(?)입을 때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자기가 입고 있던 샤워 가운을 덮어주는 인정(?)을 지닌 홍식이다. 남자에게 폭언을 듣는 영숙을 대신해 흠씬 두들겨주기도 하며 자식을 먼저 보낸 노인에게 아들을 자처해 살갑게 굴어주는 홍식을 누가 진심을 다해 미워할 수 있을까.

그와 동시에 가난에서 벗어나 크게 성공하고자 하는 그의 욕망에 나 또한 공감할 수 있었고 서민이기에 가슴이 뜨거워지는 순간순간이 존재했다. 'Boys, be ambitious!'를 외치고 쓰러지던 모습이 생각나서 또 한 번 마음이 아프다. 서울의 달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극중 달이 종종 등장하는데, 그 장면에 떠오른 달은 유일하게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게 참 소름 돋고 멋있었던 기억이 난다.

2부에 들어서 호흡이 빨라진 게 아쉬우나 전반적으로 잘 만들어진 창작 뮤지컬인 것 같다. 이필모 배우의 능청스럽지만 밉지 않은, 귀여운 홍식과 박성훈 배우의 순박하고 참 멋진 춘섭이 매력적이었다. 무대 세트도 기대했던 것보다 크고 디테일이 멋졌으며 앙상블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완성도 높은 음악과 안무도 만족을 크게 더해 준 것 같다. 너무 궁금했는데 보름이라는 짧은 공연 기간 안에 만나 볼 수 있어서 기쁘고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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